[왜냐면] 미국산 쇠고기를 안 사먹으면 된다는 대통령께 / 김미영

posted May 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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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미국산 쇠고기를 안 사먹으면 된다는 대통령께 / 김미영

2008년 5월 1일(목) 오후 7:55 [한겨레신문]




[한겨레] 군대·학교·병원·직장 단체급식…다른 먹을 게 없으니 쌩으로 굶으라는 얘긴가. 소비자 통제 상황도 덩어리 고기를 사서 먹을 때만 해당되는데 그때도 원산지 표시가 완벽해야 가능하다. 어른들은 광우병 걸릴 새도 없이 성인병 걸려 죽고 아이들은 수십년 뒤 광우병 걸리면


쇠고기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한우 고급화’로 정리되는 듯한데 그것은 다분히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는 것과 일차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는 한우 생산자를 염두에 둔 것이고 그에 못지않은 이해 당사자인 소비자에게는 별 말이 없다. 아니 은연중 (소수의, 비효율적인) 한우 축산농가가 피해 보고 도태되더라도 소비자에게는 이익 아니겠냐고 이해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시장에 쇄도할 미국산 쇠고기를 직면할 소비자를 향해서는 첫째, ‘그토록 좋은 쇠고기를 싼값에 먹을 수 있다’ 둘째, ‘그게 싫으면 안 사 먹으면 된다’가 정부의 이야기인 것 같다.


눈치 볼 것 많은 정부가 시장을 내주었더라도 우리 똑똑한 국민은 슬기로운 소비자 선택을 하여 수요량을 줄이고 그러면 시장원칙에 따라 수입량이 제한될 것이라는 낙관도 가능하다. 다음의 경우는 어떤가.


① 먹거리를 직접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다. 군대, 학교, 병원, 직장 등 각종 단체급식을 하는 자는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되는데, 대신 다른 게 제공되지 않으니 학교 급식처럼 제 돈 내고 종종 굶거나 군대처럼 ‘쌩으로’ 굶으라는 얘기다.


② 집단 급식 제공자는 소비자 건강을 추구하는 것보다 영리를 추구하는 자이기 십상이다. 자기가 제공하는 ‘짬밥’을 안 먹을 수 있는 자들이고 자기 먹을 것을 선택할 때와 상당히 다른 기준으로 먹거리를 선택할 것이다. 싼 것, 싸면서 많은 것, 싸면서도 좋은 거라고 착각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기가 쉽다.


③ 소비자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은 덩어리 고기를 사서 먹을 경우에 한한다. 설렁탕, 내장탕 등은 두고라도 중국집 류산슬에도 한식집 돌솥비빔밥에도 쇠고기는 들어간다. 하물며 곱게 갈아서 정체를 알 수 없게 하여 각종 음식에 들어간 고기를 어떻게 싫어서 안 먹을 수 있을까? 이제부터 외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 밀가루 값 인상에 이어 한우 쇠고기 값을 반영해 비싸진 음식을 사 먹거나 지금의 채식주의자들처럼 주위의 눈총을 받으며 모든 고기 비슷한 것을 걷어내고 먹어야 한다.


④ 덩어리 고기를 그램으로 달아 사는 경우에도 선택은 오도될 수 있으니, 원산지 표시가 완전 성공하겠냐는 것이다. 오늘 쇠고기 원산지 표시 감시단이 발족되었다는데 그것이 언제나 지금처럼, 처음처럼 열성적으로 굴러갈지 모르겠다.


좀더 근본적으로 돌아가 쇠고기는 그토록 좋아서 광우병을 무릅쓰고 먹을 만큼 좋은가? 소는 한 집안의 최고 재산이어서 자식 대학 공부 밑천이었다. 그런 대단한 소를 잡았으니 한 점도 남김없이 살은 물론이고 뼈, 내장 등을 샅샅이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소는 잡식성의 돼지와 달리 온갖 풀을 먹고 사니 자연적인 ‘산야초’ 보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런 영양학적, 문화적 이야기가 맞지 않게 되었다. 나는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고기를 먹게 된 것이 인류문명의 진보라 한 문화인류학자에 동의한다. ‘남의 살’ 동물성 단백질의 쫄깃한 씹는 맛과 뿌듯한 포만감은 어떤 것보다 구체적이고 실물적인 쾌락을 준다. 그러나 산업적 생산방식의 쇠고기는 참 문제 많은 음식이다.


한 가지만 지적해 보이자면 소는 풀을 먹고 되새김질을 하고 사는 동물인데 두 개의 위라는 생리구조에 전혀 맞지 않게도 곡식(옥수수) 사료를 먹인다는 것이다. 그것도 빨리 살찌우기 위해 많이 먹여 위가 터질 지경으로. 탈나지 않게 하기 위해 들이붓다시피 한다는 각종 항생제, 옴치고 뛸 수 없게 만드는 비인간적·비동물적 생육 방식 등은 더 말해 무엇하리. 소 먹일 옥수수 키우기 위해 밀림은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단일경작의 굴레 속에서 손해보는 농민, 소와 먹거리를 다투느라 비싸진 곡식값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이 쇠고기 생산의 사이클에서 이익을 보는 유일한 세력은 대규모 기업농과 (같은 주인의) 다국적 식품회사이다.


잡식성인 인간은 항상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다. 이제 상대적 풍요의 시대에 인간은 뭐든지,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넘쳐흐름 속에서 선택은 유례없이 중요해졌다. 자고로 인간은 ‘그가 먹는 바’ ((S)he is what (s)he eats)였고, 이제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그의 자아와 개성을 나타내 준다. 관념적 식이법이 대두된 것이다. 나는 세련된 자이기 때문에 스타벅스의 기름진 커피를 마시고, 나는 동양 호사가라서 한 입거리밖에 안 되는 ‘스시’를 고급 레스토랑에서 서투른 ‘찹스틱’질로 한 시간 동안 먹으며, 나는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자여서 공정무역으로 들어온 밍밍한 ‘히말라야의 선물’을 마신다.


꿀꿀이죽과 부대찌개를 걸신 들려 먹던 피난민 시절에 자기를 거는 사람이라면, 전세계에서 기아선상에 놓인 나라가 아니라면 그 어느 나라도 수입하지 않는다는 30개월 넘은 소, 도축된 소의 온갖 부대물을 원료로 한 사료를 먹인 소, 미국 소를 먹을 일이다. 싸게 사서 배 두드리며 많이 먹고 어른들은 광우병 걸릴 새도 없이 성인병 걸려 죽고 아이들은 수십년 뒤 광우병 걸려 죽으면, 먹고 죽은 귀신이라 때깔은 고울라나. 이제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것은 생존과 참살이 차원을 넘어 자존과 명예의 차원으로 되었다.


김미영 고려대 사회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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