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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홍남기 경제부총리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 대외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정부는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고 선언하는 한편 WTO 개도국 논의 관련 입장 및 대응방향 발표문을 배포했다.

이를 두고 전 농업계는 물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일부 시민단체들도 ‘WTO 개도국 지위 포기’를 철회하라고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그런데 정작 정부는 ‘포기’가 아니라 ‘주장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개도국 지위 포기(forego)’가 아닌 ‘미래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no seek)’라는 설명 아닌 설명이었다. 이에 대해 농업계는 ‘말장난’까지 해가면서 농민들을 우롱한다고 발끈했다. “술은 마시고 운전했는데 음주운전이 아니다?”에서부터 “미래협상에 한해 특혜 주장을 포기했다” 등등 패러디한 글들이 쏟아진다.
 
문재인 정부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정부에서 농업은 항상 ‘희생양’ 취급을 당했다. 정부가 바라보는 농업관은, “농민은 무식하고, 막무가내고, 헐벗고 보기 싫은 하급계층의 존재”라는 ‘차별’이 짙게 깔려 있다. 그래서 언제든 무시할 수 있고, 못 살겠다고 울부짖으면 슬쩍 떡 하나 던져주면 되는 존재고, 일부러 유식한 말을 섞어 “그런 것도 이해 못하는 존재”라고 무시한다.

말 장난으로 농가 우롱

이번 WTO 개도국 지위 포기는 지난 2월 미국 측의 문제제기를 시작으로, 7월 미국무역대표부(USTR)에 WTO 개도국 지위 개혁을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대응조차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농업계와 소통도, 피해 대책 마련에도 소홀했다.

여기서 또 정부의 말을 빌려보자. 10월 27일자 농림축산식품부가 ‘정부, 개도국 특혜 미주장 사전 조율, 협의 없는 일방 발표 논란’이란 한 언론의 보도에 대한 해명자료를 냈다.

“정부는 농식품부 내 T/F 외에도 관계부처‧농업계 간담회 등을 통해 농업계와 지속적으로 소통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면담‧간담회‧설명회 등의 횟수를 나열했다. 충분한 소통을 해왔으니 알아달라는 말이다.

10월 22일 기재부와 민관합동 간담회의 한 장면만 보자. 이날 김홍길 축산관련단체협의회장(한우협회장)‧이승호 낙농육우협회장‧문정진 토종닭협회장은 절차상의 문제 등을 제기하면서 간담회 보이콧을 선언하고 퇴장했다.

이미 개도국 지위 포기를 확정해 놓고 마치 의견을 수렴하는 모양새를 취하려고 하는 ‘요식행위’인 점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농축산인들은 더 이상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퇴장 이유였다. 간담회는 말만 간담회일 뿐 사실상은 포기에 대한 설명회였다. 이후에도 농업 부문에는 타격이 없으니 불안해하지도 말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정부의 설명이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걸까? ‘개발도상국 지위’는 세계무역기구 즉 WTO의 협상 때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에 봐달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 지위를 내세우면 150개가 넘는 조항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96년 WTO에서 농업과 기후변화 분야만 개도국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23년 만에 올 초부터 미국이 중국을 비롯 우리나라 등에 개도국 포기를 촉구한 것이다.

정부가 당장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은 앞으로 진행될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미래’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WTO의 농업 부문 협상은 10년째 거의 정지된 상태이고, 향후 언제 열릴 지도 알 수 없으니 당장엔 큰 영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개도국 지위 결국 포기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연간 1조5000억원까지 지원되던 쌀 직불금이 8000억원으로 축소될 뿐만 아니라 수입되는 농축산물의 관세도 대폭 낮춰야 한다. 그럴 경우 가뜩이나 왜소해진 식량자급률은 더 쪼그라들 것이 뻔하다.

통계청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등에 따르면 국내 농가 인구는 지난 1995년 485만명에서 2018년 231만명으로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평균 연령도 67.7세로 고령화된 상태다. 폭염일수도 2014년 7.4일에서 2018년 31.5일로 늘어 과일, 채소류는 물론 가축폐사가 증가하는 등 리스크도 커지고 있는 상태다. 국내 곡물자급률은 전 세계 평균 수치인 102.5%에 비해 극도로 낮은 23.8%에 불과하다.

농업소득은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1200만원 수준이고, 도농 간 소득 격차뿐만 아니라 농가 간 소득 격차도 심각한 상태다. 이것이 개도국 수준이 아니면 말 그대로 선진국 수준인가?

한국의 농업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농민들의 잘못이 아니다. 1960년대 공업 일변도의 성장 전략 추진으로부터 2000년대 무분별한 자유무역협정 체결까지 일관되게 농업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결과다.

정부의 60여년에 걸친 불균형 성장정책이 빚어낸, 현재 농업의 현실은 도외시한 채, 이번엔 ‘미래’를 포기했다. 그리고도 “문제가 없다”고 설명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구차한 변명이다. 농업을 무시하는 시각이 초래한 결과에 죽어나가는 것은 또 농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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